'내가 누구인가라는 가장 깊고 오랜, 질문에 관하여' 中에서


사쿙 미팜 린뽀체, "카르마를 이해하라"


 

호랑이는 카르마의 법칙을 이해하기 때문에 통찰력을 갖는다. 카르마는 산스크리트어로 '행동'을 의미한다. 이는 옷감을 짜는 것처럼 인생에서 사건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해서 카르마가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고, 그럼으로 해서 다른 사건이 발생하는 직선적인 운동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사건이 발생하는데 많은 원인과 조건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한 가지 발생하는데 많은 원인과 조건이 작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한 가지 사건은 그 옆에 있는 다른 원인 및 조건과 합해져 순식간에 또 다른 새로운 사건으로 둔갑하기도 하며, 그 사건 자체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로는 어느 한 순간 속에 원인과 결과가 동시에 있는 경우도 있다. 모든 원인은 결과이고 그리고 각각의 결과 또한 원인이다.


                                   

1962년 인도 보드가야에서 최걈 퉁빠 린뽀체(Chögyam Trungpa, 1939-1987)의 아들로

태어난 사쿙 미팜 린뽀체.  티베트 불교 '닝마빠'의 주요 스승으로서 빼놀린뽀체, 딜고 켄

체 린뽀체를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했습니다.  티베트 학자이면서 가장 존경받던 명상가

중 한 분인 '미팜 잠양 갸쵸'(Mipham Jamyang Gyatso, 1846-1912)의 환생으로 인정

받았습니다.

                                      

 

카르마는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이다. 원인이 결과가 되는 진행 과정은 물론이고, 반사 작용을 하는 것까지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달은 반사작용에 의해 호수 수면에에서 비친다. 또 햇빛은 돋보기를 치고 들어가 불을 창조한다. 누군가 아이스크림을 먹는 것으로 보면, 갑자기 우리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진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고, 그리고 그 결과로 제3의 사건이 일어난다. 달빛은 그 자체만으로 수면에 반사되지 않느다. 그러나, 물, 어둠 등 여러 원인과 조건이 마치 마술처럼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카르마는 중력처럼 세상을 이루는 기본 법칙이다. 비록 우리가 알아차리지는 못하더라도 카르마는 모든 현상에서 발생한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 그것은 상호 독립적인 원인과 조건이 합져진 것이다. 정지된 사진이 아니라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펼쳐지고 있다. 길을 걷는 단순한 동작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가 발을 내딛는 땅, 걸을 수 있는 건강, 걷도록 만드는 마음, 걸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에 의존하고 있다. 이 모두가 서로 의존하며 관계를 맺고 있다.  불교에서는 카르마를 한 생애에서 다른 생애로 넘어가는 데 기초다 되는 바탕이라고 여기고 있다. 이러한 윤회를 믿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삶이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움직이는 그 과정을 살펴보면 카르마의 작용을 확인할 수 있다.

 

카르마가 매우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많다.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불러진다. 자동차에 열쇠를 꽂고 돌리면,자동차를 움직일 수 있다. 우리의 생각과 행동, 말은 서로 이보다 밀접하게 작용한다. 한 마디 말대꾸가 친구를 자극하여 싸움으로 번지기도 하고 두 마디 사소한 말로 사랑하는 그녀와 결혼에 골인하는 행운을 맞을 수도 있다. 내가 한 말과 행동이 구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정확하게 꿰뚫을 수 없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어떤 일을 불러온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작용들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호랑이는 앞발을 내디딜 때 온 마음을 다하여 내디디는 곳에 모으는 것이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자꾸 붙잡게 되면, 이는 곧 우리 의식속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우리가 카르마의 법칙에 대해 생각하건 그렇지 않건, 심지어 카르마의 존재를 알건 모르건, 카르마는 항상 존재하며 작용한다. 카르마는 우리의 모든 구석 구석을 지배한다. 카르마는 결코 우리를 속이지 않으며 감추지도 않는다. 또한 쓰라리게도 민주적이다.  왕과 백성, 운전자나 보행자, 교사나 학생 등 사회적 지위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게 카르마의 법칙속에 살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인생 안에 타임아웃이란 없는 법이다. 우리가 의식 가장 깊은 곳에 심어 놓은 씨앗은, 그것이 무슨 씨앗이건 상관없이 언젠가는 싹을 틔우고 자라나다. 일어나는 모든 생각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자꾸 붙잡게 되면, 이는 곧 우리 의식속에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이렇게 심어진 카르마의 씨앗은 의식의 흐름가장 깊은 곳에서 100억번의 삶 동안, 발아하기 좋은 조건을 기다리며 휴식을 취한다. 그러다 일단 싹을 틔우면 금방 성장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매우 화가 나서, '그래. 반드시 앙갚음을 해 주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우리는 지금 분노라는 왕국에 환생의 씨앗을 심고 있는 거시다. 우리가 그 일을 되새기며 앙심을 품을수록 이 씨앗에 물을 주게 되고, 사랑의 씨앗이 자라나기 어려운 환경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의 씨앗에 물을 준다면, 짜증과 분노가 자리 잡고 성장할 기회는 점점 없어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뿌린 씨앗은 자라서 남이 아닌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 온다.   우리가 한 행동을 다른 사람들이 알든 모르든, 우리는 카르마를 짓고 있다. 비록 자신의 행동이 신문 1면을 떠들썩하게 장식하는 행동은 아닐지라도,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 순간에 당신이 어떤 행동을 하든지, 그 결과는 분명 나타난다. 호랑이는 행동, 말, 마음을 쳐다보며 묻는다.

 

 "나는 어떤 의도를 가졌는가?"

 "나는 지금 어떤 씨앗을 가꾸고 있는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종종 씨앗이 어떻게 열매를 맺게 되는지의 예를 통해 카르마에 대해 가르친다. 씨앗은 주요한 원인이다. 식물은 일곱 단계의 수순을 밟으며 외형적으로 성장해 간다. 씨앗, 싹, 잎 또는 묘목, 줄기, 가지, 꽃, 열매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싹이 트는 원인일까? 바로 씨앗이다. 무엇이 줄기의 원인인가? 바로 묘목이다.  어떻게 식물이 자라는가? 물, 흙, 햇빛을 이용하여 성장한다. 이것이 씨앗이 열매 맺게 되는 원인과 조건이다. 매우 기본적인 진리이며,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마음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곧 복잡해진다.

 

 

 

 

                                                              사쿙 미팜린뽀체와 부인 사쿙 왕모

 

 

이미 벌어졌던 행동들이 우리의 삶을 관통하며 질주하는데, 이때 우리는 이러한 행동이 뿜어내는 힘과 속도에 붙잡히게된다. 그리고, 혼돈이 일어나면서 무지라는 새로운 뿌리가 뻗어 내린다. 이때부터 우리의 과거는 열매를 맺는 수순에 따라 새로운 미래의 사건을 맺는 것이다. 그렇게 뿌리를 내리는 순간 우리가 갖고 있는 착한 본심은 분별심이라는 환상에 빠져들면서 희미해진다. 세상을 나와 남으로 가르는 그 순간에 , 우리는 고통의 순환이라는 삼사라('순환한다'는 의미.고통과 불만족이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말하며, 무지때문에 생긴다)의 그물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는 마치 주문을 건 다음, 자신이 스스로 그 주문에 빠져 벗어나지 못하는 마법사와 같다. 심지어 우리는 무엇이 본질인지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앟고, 영원할 것이라는 막연한 느낌만 믿고 빠져드는 경우도 있다. 우리를 둘러싼모든 조건은 변화한다. 그러나 우리는 고집스럽게도 '나'가 실재(實在)하는 존재라고 계속 우겨댄다.

 

자신 스스로 '나'라고 믿는 무지는 순간순간의 충동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 그 충동은 미덕과 부덕, 그리고 중립 가운데 하나이다. 이러한 혼동에 빠진 행동은 그 다음 순간, 불교에 따르면 다음 생애의 의식을 만드는 조건이 된다. '나'는 형태, 느낌, 관념, 충동, 의식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요소들을 우리는 머릿속에서 진정한 '나'라고 생각하고 굳게 믿어 버린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접촉한다. 즐거움을 갈망하고 즐겁지 않는 것은 피하려 한다. 그 의외의 것들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 즐거움만을 자꾸 갈망하게 되면, 이는 곧 자기가 그 전에 경험한 즐거움에 집착하는 결과를 불러온다. 그리고 이는 곧 다음 순간, 혹은 나이 먹고 죽음을 맞은 후 이어지는 다음 생애에 카르마를 낳는다.

 

무지때문에 카르마가 시작되었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무지와 카르마는 직선적인 연결이 아니다. 무지하기 때문에 그것이 카르마가 된다는 순서를 꼭 밟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은 서로 의존적이다. 카르마로 인해 무지라는 어둠에 갇히기도 한다. 이것은 늘 일어나는 현상이다. 더불어 무지가 발생하기에 앞서 다른 많은 원인이 먼저 발생한다.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현상을 접하게 되면, 우리가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그 움직이는 현상을 고립시키고 정지시키는 것이다"

 

 

물리학과 불교는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모두가 세상 만물이 정체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물을 이해하고 지각하는 현상도 마찬가지다. 불교는 형태와 현상뿐 아니라 의식도 가르친다. 의식은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찰나의 순간에도 360번씩이나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 세상 모든 사물은 움직이지 않는 고정된 형태로 보이지만, 물리학에 따르면 실제로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원자의 배열이며 소립자의 배열이다. 모든 사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현상을 접하게 되면, 우리가 인식으로 받아들이는 그 순간에 그 움직이는 현상을 고립시키고 정지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 감각은 카오스와 같은 상황을 온전히 다룰 수 없다. 우리의 의식이 눈에 보이는 현상 너머의 움직임이 있는 본질을 정지 화면으로 만들며 다음처럼 말한다.

 

"이것은 사과다."

"그것은 초콜릿 케이크다."

 

규정하는 일을 우리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해 왔다. 그리고 그 사물에 욕망을 개입시킨다. 클레샤(무지에 뿌리를 둔 혼돈된 감정을 말한다)는 우리가 다음처럼 말할 때 일어난다.

 



"케이크 먹어도 돼요? 뭐든지 할테니 먹게 해 주세요"

 

붓다에 따르면, 이미 우리는 수많은 생애 동안 이렇게 혼돈에 바탕을 두고 행동해 왔다고 한다.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의식 깊은 곳에 인쇄가 되듯 새겨지고 나면, 이것은 절대로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을 지우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는 한, 이들의 잠재적인 힘은 지속된다. 우리의 전 생애는 원인과 조건이라는 수수께끼로 가득차 있고, 원인과 조건이 온갖 결과들을 생산하고 있다. 


카르마속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은 비논리적으로 보이고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지만, 이는 우리가 모든 원인과 조건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에서는 "오직 붓다만이 공작의 모든 깃털 색깔이 왜 그런지 원인을 설명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오직 자신의 지혜를 완전히 개발해 낸 자만이 모든 이유와 조건, 그리고 이들의 상호 의존관계에 대해 확실하게 이해할 수 있다.

 

 

 

                                                         종이 룽따(기도문)를 뿌리는 티베트인

 

 

이미 저지른 행동을 되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의 행동을 통해 미래에 나타날 카르마의 진행방향을 바꿀 수는 있다. 이것이 호랑이의 길에서 우리가 미덕을 갖추고 부덕을 버리기 위해 통찰력을 사용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지금 막연하게 착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관찰하여, 그 순리에 맞게 행동할 수 있도록 자세를 다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삶이라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데 부덕을 사용한다면, 길 위에 있는 온갖 과속 방지턱 위로, 덜컹거리며 고통스러운 운행을 하게 된다. 결국 자기 스스로가 적이 되는 것이다. 


부덕한 행동을 한 카르마는 더 큰 부정적인 것들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만약 몸이라는 환경을 돌보지 않는다면 질병에 걸리고, 말을 조심하지 앟으면 우리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주게 된다. 다른 이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뜬소문을 떠벌리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에 대해 헛소문을 퍼트린다. 우리가거짓말을 하면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속이는 거짓말을 한다.

 

 

                 "부정적인 것에 빠져들고도 행복을 얻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우리의 야망이 아름다운 집, 멋진 차, 사랑스런 가족, 많은 돈을

                 가져다 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화를 내는 것도 같은 이치다. 화를 내면,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향해 더욱 적대감을 갖는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 화가 나는 불쾌한 경험만을 하게 될 것이다. 욕심은 끝이 없다. 욕심을 낼수록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낟.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가 오만하면 진실을 듣기 어렵고, 모든 부덕한 행동의 결과는 우리를 더욱 방어적으로 움츠리게 만들며, '나'라는 참호를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가 숨게 만든다. 


우리는 소망을 이루게 해주는 보석을 돌덩이와 맞바꾸고 있다. 그 돌덩이의 무게는 바람의 말을 점점 주저 앉힌다. 곧이어 우리는 삶이 목적이 없다고 느낀다. 이렇게 움츠러든 마음이 드립(티베트어.Drip부정적인 감정과 자기중심적인 사고때문에 일어나는 탁한 기운과 오염된 마음)이다. 이는 드랄라(티베트어.Drala'적을 넘어서'의 의미. 축복 에너지로서 공격적인 성품을 극복하면 일어난다.)가 우리에게서 떠났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티베트의 무지개

 

 

부정적인 것에 빠져들고도 행복을 얻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우리의 야망이 아름다운 집, 멋진 차, 사랑스런 가족, 많은 돈을 가져다 줬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카르마의 법칙에 의하면 행복은 이전에 우리가 행한 착한 행동 덕분이라고 말한다.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이런 행복은 전생에 덕을 쌓은 덕분이라고 말한다. 만약 이와는 반대로 전생을 믿지않고, 부덕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는다면, 부정적인 일에 관여함으로써 행복을 얻는 사람들을 찾아보라. 만약 이런 사람들이 두려움 속에 살고 있고 스스로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거나, 끊임없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그들의 성공이 진정한 만족과 안정된 삶을 창조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카르마를 이해하고 미덕을 갖추는 것은 행복을 불러오는 데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카르마 자체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명상을 할 때 마음을 안정시키고, 산만함을 줄이고자 노력한다. 마음이 흔들리면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는 생각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명상을 하면서 우리는 분노와 같은 큰 감정뿐만 아니라 매우 미미한 집착까지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물들을 형태가 있는 영원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무지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우리가 가진 자연스러운 원초적 본성을 넌지시 알아차리기 시작하는데, 이 본성은 선과 악, 미덕과 부덕이라는 분별심이 없으며 무엇이든 포용한다.

 

정견(正見)을 갖게 되면, 부정적인 감정이 바로 '공(空)'임을 알게 된다. 스승님들은 내가 그러한 부정적인 감정을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내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곤 하셨다.

 


"분노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인가? 분노는 무슨 색깔인가? 분노는 어떤 모양인가?"

 

이런 질문을 내 자신에게 던지고 관찰하면서, 나는 감정이란 실체가 없는 존재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비록 내가 분노라는 감정을 느꼈더라도 말이다. 지금의 감정이 사라지면, 또 다른 감정이 일어난다. 이렇듯 감정의 본질이 공허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아차리고 욕망에 집착하여 행동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눈을 가리는 드립이라는 장막을 걷어 낼 수 있다. 이것은 로봇이 된다는 듯이 아니다. 우리의 마음과 세상을 생명력있는 유동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착한 본심을 볼 수 잇는 눈을 개발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가 점차 카르마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현재 삶의 카르마에 영향을 끼치고 싶다면 미덕을 갖춘 행동을 선택해야 한다. 미래가 바로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면, 통찰력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은 하늘처럼 광대하고, 나의 행동은 참깨의 씨앗처럼 미묘하다."

 

이는 파드마삼바바(=빠드마삼바바)께서 하신 말씀이다. 이 말씀처럼, 호랑이의 길에 들어선 우리는 모든 감각을 활짝 열고 감사하는 삶을 영위하며, 카르마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한다는 마음으로 우리가 내리는 결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러한 관점을 갖는 것이 자신의 삶을 지배할 수 있는 첫걸음이다.

 

어떻게 하면 카르마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해답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다. 자신이 집에 있든지 공공 장소에 있든지 , 미덕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여야 한다. 미덕을 갖추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을 통제하는 권한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가 카르마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마음을 통제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본심을 보지 못하게 한다. 우리는 계속 무지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는 그 전에 했던 혼란스러운 행동의 결과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후 계속 만들어낸 카르마는 이 혼동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런 혼동은 미래에 그 열매로 이어진다. 미래에 나타날 많은 요소는 이미 지금 이곳에 있다. 그러나, 호랑이의 마음으로, 미래에 나타날 카르마의 진행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지금하는 행동에 대한 통찰력(파유)과 지금하는 행동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한 지혜(프라즈나)를 갖추는 것이 핵심이다. 내일의 단원은 아직 씌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머리로 떨어진 것이 민들레 씨앗인지 돌덩이인지에 따라 우리는 간지러움을 느끼거나 아픔을 느낀다. 그러나 중력은 간지러워 하지도, 울지도 않는다. 중력이 우리 일에 상관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거꾸로 가든 앞으로 가든 카르마는 신경쓰지 않는다.

 

우리가 미덕을 행하든지 부덕을 행하든지 카르마는 신경스지 않는 것이다. 카르마의 작용을 알았다고 해서 우울함을 느끼거나 폐쇄공포증에 빠질 필요는 없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다면 혼돈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다는 현실은 인정해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스스로에게 마음을 통제하고 싶은지, 아니면 통찰력없이 두려움의 씨앗을 뿌리며 미래의 시나리오를 쓰고 싶은지 물어보라. 만약 지금의 행동이 미덕을 갖추 행동이라면 과거의 카르마를 현재의 미덕을 갖춘 카르마로 바꾸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우리의 인생행로를 바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앎으로써 우리는 덕을 쌓을 수 있고, 행복과 평화를 만들기 위해 카르마를 이용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우리를 카르마로부터 자유롭게 해 준다. 감사, 통찰력, 최선을 다하는 노력은 호랑이의 도구이다. 우리는 이 도구를 통해 지금의 인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생까지도 다스릴 수 있다.

 

 


내가 누구인가라는 가장 깊고 오랜 질문에 관하여

저자
사콩 미팜 지음
출판사
판미동 | 2008-10-31 출간
카테고리
시/에세이
책소개
단 한 사람만 찾을 수 있는 ‘나’라는 세상, 당신의 삶을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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